사건의 지평선? 사스가 베이가?
시간이 멈춰버리는 곳, 사건의 지평선. 뭔가 SF영화나 게임에 주로 등장할만한 느낌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거 완전 뻥카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다루는 물리학적 팩트이다. 고3이 배우는 물리학 II에서 잠깐 다루는 다소 딥한 개념이라 물알못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할 용어이긴 하다. '사건의 지평선'을 들어봤다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게임 스킬명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올해 3월, 마이너 냄새가 풀풀 나는 '사건의 지평선'이란 단어가 제목인 노래가 나왔다. 물리 전공자의 어그로를 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제목인데다 무려 윤하가 부른다라...
연인을 비롯하여 헤어지게 될 무언가와의 고달픈 이별과 담담한 시작의 매듭을 끝이 곧 시작이 될 수 있는 물리학적인 시공간, '사건의 지평선'에 비유하는 진정한 문이과 통합형 가사에 내 감수성을 자극하는 일렉 기타 리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 취저였다. 그러나 이 노래가 나왔을 당시에는 안타깝게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굉장히 아쉬웠지만 그래도 한낱 게임용어로 치부됐던 '사건의 지평선'이 물리학적 개념임을 소개해주고, 이를 노래로 승화시켜준 윤하에게 너무 고마웠다. 무엇보다 사건의 지평선 노래 위에 올려져 있는 과학과 인문학의 비유적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성찰하고 그에 대해 글을 써 내려가며 나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음에 고마웠다.
2022.05.15 - [사이언스토리텔링] - 사건의 지평선, 가사를 해석하며 과거의 연애와 담담히 이별하는 법을 배우다.
그렇게 묻히나 했던 '사건의 지평선'이 10월부터 슬금슬금 역주행을 하더니 기어코 차트 1위에 오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열리게 된 대학 축제마다 윤하가 '사건의 지평선'을 열심히 불렀던 게 입소문이 난 것이다. 이렇게도 마이너가 메이저가 되는구나.. 뭔가 내 취향과 전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는 묘한 성취감이, 하물며 나도 들뜨게 하는데 윤하 본인은 얼마나 감개무량할까.. 괜히 내가 뿌듯했다.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 모퉁이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하나 둘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윤하 - 사건의 지평선 中
빛과 시간, 모두 멈춰버리는 사건의 지평선
빛은 너무나 가벼워서(light), 말 그대로 빛(light)이 될 수 있었다. 자연에서 가장 빠른 건 빛이기 때문에 한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정보는 빛을 통해 다른 영역으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빛의 이동에 제한이 생긴다면 정보 전달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빛을 통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빛을 통한 정보가 도달할 수 없는 시공간의 경계, '사건의 지평선'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흔히 지평선 하면 멀리 땅 아래로 태양이 넘어가서 태양이 보이지 않게 되고,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가게 되면 그 너머에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더불어 '사건의 지평선'에서는 곧게 나아가던 시간의 흐름마저 일단락되기 때문에 그 너머와의 어떠한 상호 작용도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왜 '사건의 지평선'에선 빛과 시간이 멈춰버리며, 이 희한한 공간은 우주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별의 일생을 살펴봐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별, 태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밝게 빛나는 별, 태양
태양을 '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 하지만 태양은 별이다. 스스로 빛을 내기 때문이다. 태양도 저 멀리 어딘가에 살고 있을 외계인에게는 밤하늘을 수놓는 별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밝게 빛나는 달도 별일까? 아니다. 달은 그저 태양 빛을 반사하기만 할 뿐 스스로 빛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별 스스로 빛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작을 태우거나 폭죽을 터뜨릴 때 빛이 나는 이유는 발화 물질이 산소와 만나 연소를 하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밝고 뜨거운 태양이 석탄과 산소로 이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즉 태양이 밝게 빛나는 이유를 화학적 연소 과정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 의거하면 태양의 수명은 약 1000년에 지나지 않는다.
태양은 초당 3.9 X 10^26J의 거대한 에너지를 무려 46억 년 간 끊임없이 방출하고 있다. 이 어마어마한 에너지는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그 답에 대한 힌트를 아인슈타인이 찾았다.
아인슈타인은 질량도 에너지의 한 형태이며,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전환될 수 있다는 '질량 에너지 등가 원리'를 발표했다. 많이 봤었을 오른쪽 수식이 '질량 에너지 등가 원리' 이론 그 잡채다. 이 식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질량이라고 부르던 것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이다.
온도와 압력이 매우 높은 태양 중심부에서는 수소 원자핵 4개가 결합하여 헬륨 원자핵 1개가 만들어지는 반응이 일어난다. 이때 질량이 약간 감소함을 확인할 수 있다. '질량 보존 법칙'에 따르면 반응 전후 총질량은 보존되어야 한다. 그러나 질량이 감소했다. 질량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여긴다면 답이 나오지 않지만,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걸 떠올리면 해결된다.
감소된 질량은 'E=mc^2(m: 감소된 질량)'식을 만족하는 만큼의 에너지로 전환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원자핵이 합쳐져 새로운 원자핵이 만들어지는 반응을 핵융합이라 하며, 이 핵융합 반응이 태양의 에너지원이다. 즉, 태양은 석탄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수소를 태움으로써 에너지를 만든다. 그렇게 방출된 태양 복사 에너지가 우주 공간을 누비며 극히 일부(태양 에너지의 22억 분의 1)가 지구에 도달하게 된다.
수소의 핵융합 반응을 바탕으로 계산된 태양의 수명은 약 100억 년이라고 한다. 즉 지금의 태양은 딱 절반만큼 살아온 청년인 셈이다. 앞으로 남은 50억 년 동안, 태양은 수소를 태워 헬륨을 재로 남기면서 한없이 성장해갈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빛
별은 한없이 팽창하다가 핵융합의 재료가 소진되면, 끝없이 수축한 뒤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블랙홀이 된다. 별의 엄청났던 질량이 사람의 손바닥만한 크기에 압축되다 보니 블랙홀의 중력은 매우 강하다.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별이 사라진 자리, 그 근처를 아른거리던 빛은 아스라이 흔적을 남기고 블랙홀 내부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래서 블랙홀은 보이지 않는 존재다. 다만 빛이 남긴 흔적을 통해 블랙홀의 존재를 가늠할 뿐이다.
아낌없이 반짝였던 시간이 옅어져 가더라도
한때 반짝였던 과거의 시간은 희미한 추억이 되어 내 안에 살아 숨 쉬듯이, 찬란하게 빛났던 별의 시간도 블랙홀 어딘가에 머물러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곳이 어딜까?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큰 곳에서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만일 중력이 무한대로 큰 곳이 있다면 그곳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다 못해 정지해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간이 옅어지며 멈춰버리는 곳을 '사건의 지평선'이라 한다.
윤하는 이러한 물리학적 팩트의 비유와 더불어, 한 단계 더 나아가 지나가버린 과거와 어떻게 끝매듭을 지어야 바람직할까에 대한 본인만의 인문학적 성찰을 가사에 담았다.
돌아보면 과거의 인연들에게 모두 서투르지 않았나란 후회를 하게 된다. 그게 연인이었을 수도, 친구였을 수도, 가족이었을 수도, 과거의 나일 수도 있다. 서툴렀던 과거는 시간 속에 점점 옅어져서 아득한 기억의 지평선 너머 아스라이 흩어진다. 그러나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무언가와는 어떠한 상호 작용이 불가능했듯이, 기억의 지평선 너머의 과거와는 더 이상 상호 작용을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헤어진 연인이나 사랑하는 가족, 친했던 친구, 반려동물, 그리고 과거의 어리석었던 나. 영원할 것 같고 익숙했던 존재들을 기억의 지평선 너머로 담담하게 보내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서로의 끝이 새로운 길 모퉁이가 될 수 있는 법.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 모퉁이
2022.03.03 - [생각통] - [수업 오리엔테이션] 수업의 첫매듭
고등학교에 첫 입학했던 3월, 모든 게 새롭고 뭐든 잘해보자는 각오와 의지를 안고 있을 여러분에게 첫 매듭을 잘 지어보자고 격려했던 통합과학 첫 수업이 기억날런지 모르겠다. 그 후 1년, 여러분은 어떻게 보냈는가? 각자의 레고 블록 모양과 색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 시간들엔 어김없이 후회와 미련들이 빼곡히 차있을지도 모르겠다. 1년을 나름대로 열심히 보내보려 했지만, 내 레고 블록 색과 모양은 커녕 뭘 했는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던 어설펐던 시간이 앞으로 남은 2년 동안 반복되지 않을까란 두려움이 들 때 이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행성이 태양을 도는 데 필요한 시간'과
'내가 소기의 목적을 거두는 데 필요한 시간'이
정확히 일치할 이유가 뭔가?
후회와 미련은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보내버리자.
끝이 마무리되는 지평선에서 새로운 내일이 떠오르듯이
어설프고 어리석었던 과거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는
좀 더 성숙한 나로의 도약을 위한 현명한 '마지막 매듭'을 지어보자.
'2015개정 통합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SG와 수소 에너지 (2) | 2023.12.05 |
---|---|
신소재 이야기 ① {그래핀} (0) | 2023.08.24 |
전자기 유도가 쏘아 올린 무선 전력 수송 (0) | 2022.10.21 |
ESG와 신재생 에너지 그리고 메타버스 (3) | 2021.08.06 |
발전 방식과 미래의 전력 수송 기술 (184) | 2021.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