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 중학교 교사가 길가다가 참수를 당하는 끔찍한 테러가 프랑스에서 발생했어요.
가해자는 피해자가 수업 시간 중 언론의 자유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그린 무함마드 캐리커쳐가 무함마드를 모욕했다며 테러를 자행한 것이랍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요..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는 집착이 일으킨 비극입니다. 이런 비극은 이전부터 있었고,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유구한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어요.
히틀러의 나치즘, 유태인의 시오니즘 등 인종 청소 및 정치적 숙청의 과정은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개입되어 많은 학살과 수많은 불행으로 귀결됐습니다.
경계는 인간이 만든 것
너와 나의 갈등, 나라와 나라의 갈등, 진보와 보수의 갈등, 모든 갈등은 이 경계를 사이에 두고 일어납니다.
어떤 잣대의 경계를 넘어선 이쪽은 옳은 것이고, 저쪽은 틀린 것이다는 판단은 흑백논리의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죠. 사실 경계는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경계는 실체가 아니라 관념이죠.
먼 별의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는 상황을 가정해볼까요? 이제 막 태양계에 진입한 그들에게 지구는 아주 작은 점으로 보일겁니다. 좀 더 가까이 접근하면 지구는 탁구공 크기로 보이고, 더 가까이 오면 테니스공 크기, 더 가까이 오면 농구공 크기로 보이겠죠. 아직까진 지구는 완전한 구 형태이고 표면은 아주 매끄러운 면이라, 하늘과 땅은 칼로 자른 듯 경계가 분명합니다.
좀 더 가까이 접근하면 국가의 대륙이 보이기 시작하고, 만리장성과 같은 문화유산도 볼 수 있어요. 이때부터 지구의 표면에 약간의 굴곡이 보입니다. 산과 골짜기가 보이는 순간부터는 지구의 표면이 더 이상 매끈한 구면이 아니에요. 하늘과 땅의 경계는 아주 복잡해지죠.
외계인은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알게 됩니다. 지구의 표면이 동그랗고 매끈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거칠고 복잡한 구조였다는 것을 말이죠. 땅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해보면 어떨까요? 하늘과 땅의 경계는 사라지고 맙니다. 더 이상 하늘과 땅이라는 구별이 무의미해지죠.
경계라는 것이 하늘과 땅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의 경계는 멀리서 보면 분명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모호해져요. 국경선이 그래요. 미터 단위로 보면 경계가 분명할지 모르지만, 센티미터 단위로 보면 모호합니다.
역사적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1392년 8월 5일은 조선왕조 건국일이라네요.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개국한 조선 건국일. 아주 간단하고, 확실한 사건이죠. 하지만 1392년 8월 5일, 바로 그날에 살았던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이가 조선의 개국을 알았을까요? 아마 공민왕을 임금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이성계를 임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뒤섞여있지 않았을까요? 이처럼 역사적 사건도 멀리서 보면 분명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모호해집니다.
드래곤볼에서 피콜로는 세상을 위협하는 악인이었어요. 그러나 손오반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마다하지 않는 선을 보여준 반전의 캐릭터였습니다. 나쁜 사람이 항상 나빠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선과 악을 가르는 경계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 관념일 뿐이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죠. 손오공은 착한 피콜로, 나쁜 피콜로가 아닌 그저 피콜로 그 존재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천하제일 무도대회에서 생사를 가르는 대결 이후에 피콜로에게 선두를 먹이고 살려 보내지 않았을까요? (물론 시리즈를 이어가기 위한 작가의 떡밥이었을 테지만, 그래도 오반을 위해 희생하는 피콜로는 쥰내 멋있었어요.)
이렇듯 가끔은 상황이 사람을 선하게도 때론 악하게도 만드는 듯 합니다.
마치 빛처럼요.
빛, 경계를 깨뜨린 양자 역학
우주 창조의 원인이고 만물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참으로 묘한 것, 바로 빛입니다. 우리는 물리학 시간에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한 빛의 오묘한 이중적인 성질을 두고 빛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갑론을박을 살펴보았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파동과 입자를 가르는 경계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 관념이라면, 사람을 반드시 착한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으로 구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이 반드시 입자 아니면 파동이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듯이 , 빛도 파동이라고 하면 이미 파동이 아니고 입자라고 하면 이미 입자가 아닙니다. 빛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닌, 빛은 그저 빛일 뿐이죠.
굉장히 작은 세계를 잘 들여다 보기 위해서는 가까이 보아야 합니다. 뭐든 가까이서 보면 경계는 모호해졌죠? 가까이 보아야 하는 매우 작은 세계의 현상을 설명하는 양자역학에서도 경계의 모호함은 빗나가지 않습니다.
밤거리에서 화려하게 번쩍이는 전광판의 그림이 빠르게 이동합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이동하는 것 하나 없는, 제자리에서 점멸되는 불빛뿐이죠. 화면에 있는 무수히 많은 전구들이 켜졌다 꺼졌다 할 뿐인데 멀리서 보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양자세계에서는 물체의 '이동'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물체의 위치나 운동량을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단지 어떤 곳에 발견될 '확률'만 존재할 뿐입니다. 양자역학에서 물체가 이동하는 것은 그 물체가 존재할 확률분포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현상이에요. 이쪽에 있던 물체가 사라지고 저쪽에서 생겨나는 것이죠. 다만 그것이 너무 빨리 일어나다 보니, 우리 눈에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즉 물체의 운동이란, 물체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과 멸이 시공간 상에서 변하는 현상입니다.
이처럼 양자역학에선 절대적인 위치나 운동량이 아닌, 경계가 희미한 확률 분포만 존재할 뿐이며, 이러한 경계의 희미함을 전제로 하는 양자물리적 해석은 미시 세계뿐만이 아니라 거시 세계의 현상에도 너무나도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습니다. 그만큼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걸 방증하는 사례겠죠?
기억 저편 어딘가 묻혀있는 수많은 일출 장면 중에 하나만을 꼽으라면, 2018년 여름 제주 성산 일출봉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바라본 일출이에요. 파스텔톤의 보랏빛 하늘은 일출이 가까워질 때쯤 되니 점점 짙은 바다색처럼 파래져가더라고요. 파란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물들이는 오렌지 빛 경계 너머 떠오르는 태양과 그 분위기는 정말이지, 드라마 속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때 새삼 깨달았던 건, 일출 풍경과 일몰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더라는 사실이었죠. 단지 해가 위로 솟냐 아래로 들어가냐의 차이였을 뿐, 하늘의 경계에서 해가 머물고 있을 때, 보랏빛 하늘 틈새를 물들이는 오렌지 빛은 해가 뜰 때나 질 때나 똑같더라고요. 수평선 너머 져가는 태양은 누군가에겐 솟아 올라가기 위한 태양이 되듯이, 누군가에게 일몰이었을 그 순간은 나에겐 일출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겠죠.
이처럼 시작과 끝이 단절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매듭 지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경계의 희미함에 있지 않을까요?
"니들이 꿈을 꾸던 그 시간에 나도 꿈을 꿨지. 두 눈 똑바로 뜬 채로"
내 새벽은 원래 일몰이 지나고
하늘이 까매진 후에야 해가 뜨네
뭐를 하든 경쟁하라 배웠으니
우린 우리의 시차로 도망칠 수밖에
‘야, 일찍 일어나야 성공해, 안 그래?’
맞는 말이지 다
근데 니들이 꿈을 꾸던 그 시간에
나도 꿈을 꿨지
두 눈 똑바로 뜬 채로
We're livin' in a different time zone
바뀌어버린 낮과 밤이야
Have a good night 먼저 자
아직 난 일하는 중이야
모두 위험하다는 시간이 우린 되려 편해
밝아진 창문 밖을 봐야지 비로소 맘이 편해
모두가 다 피하는 반지하가 우린 편해
모두 비웃었던 동방의 소음이 어느새
전국을 울려대
"야, 이게 우리 시차의 결과고,
우린 아직 여기 산다 전해"
우원재 - 시차 中
일몰이 지나 하늘이 까매진 후에야 내 태양이 뜬다는 그들의 철학은 내가 하루의 시작을 정하겠다는 깡 그 자체예요. 외부에서 정해주는 기준과 경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내 쪼대로 살겠다는 포부가 담겨있죠.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기만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외부의 잡음을 차단하고 오로지 내 쪼대로 나의 삶을 열심히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죠.
남들이 꿈을 꾸던 시간에 두 눈을 뜬 채로 꿈을 꿨던 그들의 이야기는 '시차'란 노래로 탄생하여 2017년 전국을 울려 댔습니다. 성공으로 대변되는 메인 스트림을 낮에, 그렇지 못한 다운 스트림을 밤에 비유하여, 낮과 밤의 경계에서 굳이 세속의 시차에 적응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쪼대로 살아가겠다는 그들의 태도가 돋보이네요.
틀린 건 없다. 다름만이 있을 뿐
빛을 파동과 입자가 아닌 그저 '빛'이란 본질에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여러분은 성공과 실패라는 사람들이 만든 이분법적 관념에 매몰되지 말고 자신의 본질에 집중하는, 즉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성공 여부를 떠나 내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나 자신과 삶을 기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노래에 담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내 삶은 틀리지 않았고 너랑은 그저 다를 뿐이라는 깡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경계를 밝게 비추는 빛이 되어, 사실은 이 경계가 너무나 희미해서 의미 없었음을 알게 해주리라 확신합니다.
「참고자료 및 문헌」
시차 - 우원재, 로꼬, 그레이
순수에 대한 집착 - 생각통
우주를 만지다 - 권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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