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규석기 시대
20세기, 원자와 고체라는 무미건조한 물체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면 반도체는 존재할 수 없었고, 반도체가 없었다면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비롯한 IT 기기는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IT 기기의 중요성과 동시에 그 안에 들어가는 반도체의 재료가 '규소'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지금 우리는 규석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반도체는 어떤 특성을 지녔기에 규석기 시대를 장악한 핵심 아이템이 되었을까? 그 답은 바로 디지털(=이진법)과 관련이 있다.
반도체와 이진법
앞서 배웠듯이 pn 접합에 가해지는 전압의 방향이 어떤지에 따라 전류 흐름의 여부가 판가름 났다. 이 포인트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전류의 흐름 여부가 중요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전류의 흐름이 디지털 언어, 1 또는 0으로 치환됐다는 것에 있다. 즉, 반도체는 전류의 흐름을 이용하여 논리 구조와 연산 등 각종 값을 컴퓨터 언어로 변환하는 장치인 셈이다.
1과 0을 표시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반도체 소자로는 '트랜지스터'가 있다. 이 트랜지스터들이 수십억 개 모인 구조가 '집적 회로(IC)'이며 반도체 칩으로도 불린다. IC는 정보를 저장하고 연산을 수행하는 일종의 두뇌 역할을 함으로써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비롯한 IT기기, 냉장고나 세탁기를 비롯한 생활 가전과 자동차까지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반도체 강국, 대한민국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핵심 수출 상품으로 거론되는 반도체는 정확히 말하면 집적 회로(IC)이다. IC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반도체 강국, 대한민국이라지만 사실 대한민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한해서만 강국이다. 그렇다면 '메모리 반도체'는 무엇일까?
메모리 반도체의 종류는 D램과 낸드 플래시, 두 종류가 있다. D램은 연산속도가 빠르지만 전원이 꺼지면 데이터가 날아가는 휘발성 메모리이고, 낸드 플래시는 연산속도가 느리지만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남아 있는 비휘발성 메모리이다. HDD, SSD가 낸드 플래시라고 보면 된다. 이런 메모리 반도체의 주요 고객은 과거엔 PC를 비롯한 가전 회사였지만, 요즘과 같은 빅 데이터 시대에, 많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이터 센터에도 메모리 반도체가 들어가는 만큼 클라우드 기업(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도 주요 고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반도체 산업에서 메모리 반도체의 점유율은 시스템 반도체의 점유율보다 낮다. 현재 시스템 반도체 시장 규모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의 약 2배이다. 하지만 한국의 시스템 반도체 점유율은 3%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선 한국의 입지가 너무 작다.
그렇다면 시스템 반도체는 무엇일까?
시스템 반도체는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라고 보면 된다. 컴퓨터와 노트북에 들어가는 CPU,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AP, 초기엔 그래픽을 처리하기 위한 용도였지만 지금은 AI 딥러닝에 더 많이 활용되는 GPU, 자동차 제어를 위해 사용되는 MPU, MCU 등등 모두 연산을 수행하는 시스템 반도체들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 좋은 시스템 반도체를 놔두고 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했을까?
때는 1970년, 대한민국 기업 중 삼성이 최초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다. 하지만 이땐 반도체가 산업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지 30년 가까이 지나버린 시점이었다. 삼성은 반도체 시장에서 엄청난 후발주자인 셈이었다. 당시 반도체 시장의 두 강자는 미국과 일본이었다. 시스템 반도체의 핵심인 CPU는 인텔이 꽉 잡고 있어서 넘보기 쉽지 않았다. 특히 시스템 반도체는 복잡한 설계 기술이 핵심인 분야라 진입 장벽이 높아 그나마 메모리 반도체가 더 승산이 있다고 삼성은 판단했다.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반도체를 둘러싼 미일 간 갈등이 격화돼 D램 분야의 강자였던 일본이 휘청거릴 때 삼성이 이 기회를 치고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1993년,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 1위를 먹고 30년 가까이 D램 강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2011년 12월, 삼성은 인텔을 제치고 전 세계 반도체 기업 시총 세계 1위에 올라서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2020년 9월 기준으로 TSMC가 삼성을 제치고 시총 1위 기업이 됐고, 엔비디아가 2위로 올라와 삼성은 3위로 밀려나게 됐다. 엔비디아는 AI 딥러닝에 활용되는 시스템 반도체 GPU를 만드는 기업이라서 2위로 올라온 게 수긍이 되지만, TSMC는 도대체 어떤 반도체 회사길래 시총 1위에 오르게 됐을까?
그 답을 알려면 반도체 산업 분야를 알아야 한다.
반도체 산업 분야
반도체 산업 분야는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뉜다. 각각의 반도체 대표 기업들은 이 모든 영역을 다 해 먹지 않고 자신이 잘하는 영역만을 특화하여 수익을 창출한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이 모든 산업 영역(팹리스, 디자인, 파운드리)을 다 해 먹는다. 그러나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모든 산업 영역을 한 기업이 다 해 먹는 것보다는 분업화를 했을 때 효율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각 기업은 자신 있는 산업 영역 하나에만 치중한다. 유일하게 인텔만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디자인과 팹리스, 파운드리를 모두 다 해 먹는다. 그런 종합 반도체 기업이 세계 반도체 기업 시총 4위라는 건 그만큼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선 분업화가 효율적이라는 걸 방증하는 사례이지 않을까?
요즘 들어 IT 기기들의 성능이 발전하고 종류가 다양해진데다, 비대면 문화에 가속화를 일으키고 있는 코로나19 때문에 자연스럽게 반도체 수요도 폭증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반도체 제작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TSMC가 현재 반도체 기업 중 시총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삼성도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한해서 파운드리 사업 글로벌 점유율을 키워가면서 TSMC를 따라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TSMC나 삼성은 어떤 과정을 거쳐 반도체를 제작하는 것일까?
반도체 제작 과정
반도체는 실리콘이라는 기판(웨이퍼)위에 전도성 물질을 쌓아 만든 3차원 형태의 고집적 회로이다. 그런데 이 회로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고 정밀해서 물리 화학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만들 수 있다.
일단 그림 위에 기름종이같이 불투명한 종이를 올려놓고 선을 따라 그리는 것처럼 반도체 설계도를 빛과 렌즈를 이용해 웨이퍼 위에 비친다.(감광) 이때 특정 물질이 반도체 위에 도포되는데, 이것이 바로 '포토레지스트'이다. 다음에는 이렇게 그려진 그림을 따라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야 하는데(식각) 이때 사용되는 것이 '불화수소'이다. 반도체는 감광과 식각을 수없이 반복하며 회로를 층층으로 쌓아 만든다.
일본은 이를 노리고 2019년 여름에 한국으로의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수출을 규제하여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 타격을 가하려 했다. 이는 당시 위안부와 관련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고 이에 보복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명백한 도발이었다.
결국 일본의 자해에 가까운 행동은 자국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약화시켰고 국제 신뢰를 잃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GPU(시스템 반도체)와 AI, 자율주행, 비트코인
시스템 반도체의 비중과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질 전망이다. 그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AI에 있다. AI 딥러닝에 필수적인 시스템 반도체는 GPU이고, 이 GPU 산업 점유율을 독점하고 있는 기업이 엔비디아이다.
GPU는 초창기에 이름 그대로 그래픽을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져 CPU를 서브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AI가 키워드가 된 지금, CPU를 밀어내고 메인 스트림이 되었다.
AI 딥러닝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시점은 2010년이었다. 딥러닝은 기계가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돌려서 결과 값을 내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포인트는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 대목에서 CPU보다 GPU가 경쟁력을 가졌다.
CPU는 통제가 주목적이어서 성능이 뛰어나지만 중앙에서 모든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계산해야 될 게 늘어날수록 속도가 느려지고 전력 소모가 크다는 한계를 가진다. 반면 GPU는 아주 복잡한 연산까진 할 수 없지만, 방대한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는 병렬 처리 구조로 설계되어 있어 빠른 계산이 가능하고 전력 소모가 적다.
CPU는 수학자 1명, GPU는 초등학생 1000명에 비유할 수 있다. 고난이도 문제는 GPU가 풀 수 없지만, 단순한 문제를 1000번 풀어야 하는 경우라면 GPU가 훨씬 효율적이다.
인간은 많은 경험을 통해 직관을 갖추게 된다. 이처럼 AI도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통한 학습으로 직관력을 가지는 데 있어 더 뛰어난 성능의 CPU를 개발하는 게 답일 거라고 봤던 기존의 예상과 달리 방대한 데이터를 무리 없이 소화하여 단순 연산 반복에 능한 병렬 구조의 GPU가 딥러닝의 핵심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나아가 주변의 방대한 데이터를 끊임없이 인식하고 처리하는 반복된 연산으로 이뤄지는 자율주행과 비트코인 채굴에도 GPU가 쓰이는 만큼, GPU의 활용도는 과거 CPU 못지않게 올라가고 있는 추세다.
완벽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도체 산업에도 큰 변화의 물결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
애플과 구글을 비롯한 IT 기업들이 GPU보다 더 성능이 뛰어난 AI만을 위한 새로운 반도체 칩(NPU) 개발에서 선두를 차지하기 위해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고, 인텔 역시 기존 방식을 뒤엎는 새로운 반도체를 개발하겠다고 공언했다.
가전기기에 인간의 뇌를 장착함으로써 진정한 IoT를 실현시킬 차세대 반도체 "NPU"
커지는 AI 시장에서 사람의 뇌를 모방해 만든 반도체 NPU가 등장했다. 2019년 기준 NPU 성능은 인간의 두뇌보다 100배 느릴 정도로 걸음마 단계에 있지만, NPU의 성능이 지금보다 더 발전하면 인터넷 연결 없이 기기들이 데이터를 처리하여 연산하는 과정이 가능해져서 진정한 IoT가 이뤄지게 되고, 빅스비와 시리 같은 인공지능 비서가 정말 비서다운 비서로 발전하게 된다.
NPU 개발은 전통 반도체 기업들보단 IT 기업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한다. PC, 스마트폰, 각종 서비스 등 수많은 테스트 베드로 개발한 NPU를 바로 실험해볼 수 있는 데다, 인공지능 학습을 위한 빅데이터 수집도 훨씬 쉽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통 반도체 업체들은 칩 설계 경험은 많지만 이를 구현하고 적용해볼 플랫폼이 없다는 점에서 불리하다. 반도체 산업의 문법이 완전히 뒤바뀌고 있는 요즘이다.
전통 반도체 기업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인텔은 CPU와 메모리 반도체가 작동하던 기존 구동 방식을 완전 깨버리는 새로운 체제의 반도체를 내놓겠다며 벼르고 있고, 엔비디아는 반도체 디자인 회사 ARM을 인수하면서 새로운 제작 구조를 짜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차세대 반도체 전쟁의 승자는 누가 되고, 인류는 이 반도체 전쟁으로 인해 어떤 수혜를 얻을까?
이 모든 발전의 핵심은 '기초 과학'
세상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한 걸음 도약할 때마다 늘 그 뒤에는 커다란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
현대 공학 기술은 달의 궤도를 예측한 뉴턴의 역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빛의 성질에 관한 맥스웰의 연구가 낳은 뜻밖의 산물이었고, 컴퓨터는 20세기 원자라는 무미건조한 물체에 대한 양자역학적 연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GPS 시스템 역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궁금증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작동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모든 기술 분야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기초과학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당장 밥과 돈이 나오지 않는 순수 학문이라는 이유로 기초 과학을 등한시해서는 안 될 이유가 이 포인트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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