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시큰한 가을이 다가오면 불현듯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때는 2학기 개강이 시작된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책 반납을 위해 도서관을 거쳐 자연관으로 갈 생각으로 인문관 근처를 걷던 중 한 사람이 내 눈에 띄었다. 하얀 얼굴, 까만 머리에 안경을 쓴 차도녀 스타일이었던 그녀. 우연히 마주쳤던 그녀는 그 이후로 항상 내 눈에 띄었다. 도서관에서나 식당에서나 심지어 체력단련실에서도 그녀는 여지없이 나타났다. 내 일상 루틴과 너무나 비슷했던 그녀였기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녀는 그 해 2학기에 복학을 한 국어교육과 학부생이었다. 밥도 혼자, 공부도 혼자, 운동도 혼자, 그녀가 왜 혼자일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됐다.
새하얀 얼굴에 까만 머리의 그녀는 차가워보이고 고독해 보여 때로는 신비로워보이기까지 했다. 가끔 도서관이나 체력단련실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가 있었다. 죄지은 것마냥 화들짝 놀라 눈길을 피하곤 했던 쭈구리 시절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지만 내가 당신을 눈여겨 보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모순된 감정.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품어봤을 감정. 사랑은 그래서 이상하고 특별한 감정이라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사랑은 특별한 이차원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스테리 그려왔던 모든 게 다 될 것 같은데
사랑은 이상한 이차원
눈물에 번져갈 스토리 너의 손을 잡아보고 싶은데
사랑은 특별한 이차원
그림자가 없는 미스테리 그려왔던 모든 게 다 될 것 같은데
사랑은 이상한 이차원
바람에 넘어갈 페이지 내 목소릴 들려주고 싶은데
들리진 않아도 닿지는 않아도
내 맘을 이 풍선에 저 풍선에 담아 여기 Pop! 저기 Pop! Pop! Pop! Pop!
내 맘을 곱게 접어서 세우면 이 차원을 넘어 한 칸씩 한 칸씩 네 세상으로
점 하나는 0차원이다. 이 점을 수직한 방향으로 쭉 그으면 생기는 선은 1차원이다. 1차원 선분을 선에 수직한 방향으로 한 번 움직이면 2차원의 면이 만들어지고, 이 면에 수직한 방향으로 면을 움직이면 3차원 입방체가 만들어진다.
눈치를 챘나 모르겠지만,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그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예를 들어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2차원에 존재하지 않는 방향(면에 수직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러블리즈의 Wow는 사랑에 빠졌을 때 생기는 감정을 이러한 차원 간 이동으로 비유한 재밌는 노래다.
누구나 마음에 품고 있는 상대와 잘 돼서 꽁냥 거릴 상상만으로 가슴 벅차고 설렜던 경험을 겪어 보았을 것이다. 손도 잡아보고 싶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상상 속에서는 이 모든 게 가능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시궁창이다. 상상 속에서라면 그려왔던 모든 게 다 될 거 같지만 현실에선 되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상상은 실체가 아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 보니 나와 상대 간 관계의 실체는 전혀 없다. 그렇다 보니 우리 사이 관계의 깊이를 알 수 없다. 2차원엔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만 있을 뿐 위아래는 없다. 즉, 깊이감이 없는 2차원엔 그림자가 생길 리 만무하다. 작사가는 상상 속에서만 키워가는 소극적인 사랑은 실체가 없음을 깊이감과 그림자가 없는 2차원으로 비유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커져만 가는 내 마음을 상대에게 들려주고 싶지만, 상대가 내 맘을 알아줬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 무색하게 종이면과 다를 바 없는 나의 2차원 사랑은 바람에 넘어가는 책 페이지처럼 제자리에서만 넘겨질 뿐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될 일이 없다. 나만 알고 상대가 알 수 없는 나만의 슬픈 스토리는 그렇게 눈물에 번져만 간다.
결국 화자는 상대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상상에만 갇혀있는 소극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들리진 않아도, 닿지는 않아도 뭐가 됐든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다짐한다. 사랑의 쟁취를 위해서라면 내 목소리를 두둥실 떠다니는 풍선에 담아 보낸다든지 내 마음을 접어 세움으로써 2차원을 넘나드는 차원 이동의 수고를 해서라도 상대에게 내 사랑을 관철시키겠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걸 작사가는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극적인 자세로는 사랑을 쟁취할 수도 없고, 설령 쟁취한 사랑이라도 결코 지킬 수 없다. 사실 사랑뿐만이 아니라 인생사 뭐든 얻고자 한다면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내 취향에 딱 맞는 누군가가 내 눈 앞에 떡 하며 나타나길 기다리고, 그 누군가가 내 사람이 되길 간절히 희망한다. 물론 그런 이상형과 연이 닿아 백년해로하는 행운의 커플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로또의 주인공이 될 수 없듯이 그럴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그런 가능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이상형과의 연애가 꼭 행복한 동화만은 아니다. 이상형과의 연애가 꿈에 그리던 것처럼 마냥 행복하지도 않았고, 이상형이 아닌 사람과의 열렬하고 애틋한 연애 경험을 통해 나는 이상형을 찾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이상형을 찾는 것보다는 다양한 경험과 적극적인 자기 성찰을 통해 나만의 취향과 연애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예전엔 몰랐지만 이제는 천생연분으로 보이는 예쁜 커플을 볼 때마다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관계를 탄탄하게 만들었을지 가늠하게 된다.
그릿의 내용 일부분을 인용하여 적절히 각색함.
'매사가 시들하고 진로도 정하지 못하겠어요. 관심이 가는 일은 너무 많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진로와 적성을 찾을 때 겪는 문제는 연애 상대를 찾을 때 겪는 문제와 비슷하다.
강렬한 확신과 열정을 자아낼 꿈과 진로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찾아 나서지만 사실 내 입맛에 맞는 꿈과 진로는 이상형처럼 찾기 굉장히 힘들고, 설령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과 결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찾기 힘든 걸 애써 찾으려다 보니 진로 탐색이 너무나 막연해지고 결이 맞지 않는 꿈을 나에게 꾸역꾸역 맞추려다 보니 힘들어진다. 꿈과 진로도 완성된 걸 찾는 게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가는 것인데 말이다.
연인이 될 가능성이 엿보이는 사람과의 만남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나중에는 평생 열정을 쏟는 사람이 될지라도 처음 그 사람을 접하는 순간은 잔잔하게 내레이션이 이어지는 영화의 첫 장면과 비슷하다.
꿈과 진로도 마찬가지다.
우리 대부분은 열정을 떠올릴 때 파이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앞으로 요리에 종사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거나, 처음 출전한 수영 시합에서 물에 뛰어드는 순간 언젠가 올림픽에 출전하리라고 예견한다거나 <호밀밭의 파수꾼>을 탈고하는 순간 작가가 될 운명을 깨닫는 식으로 갑자기 한순간에 느끼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처음에 관심사를 발견했을 때는 종종 본인도 모르고 넘어간다. 즉 이제 막 무언가에 관심이 생길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관심사를 발견한 뒤 오랜 시간 적극적으로 관심을 발전시켜야 한다. 처음에 관심이 생긴 후에도 계속 그 일을 경험함으로써 거듭거듭 흥미를 유발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단지 어떤 일을 좋아한다고 그 일을 뛰어나게 잘하게 되지는 않는다. 노력하지 않으면 잘할 수 없다.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만 여러분들이 원하는 꿈과 진로를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
영화의 첫 장면만 보고 영화의 스토리 라인과 재미를 확신할 수 없다. 아름답고 설레는 첫 만남 일지라도 연인 관계의 지속성을 장담하긴 힘들다. 이처럼 '이 꿈과 진로는 나의 숙명이야!'라는 식의 강렬한 확신을 기대하는 건 허구적 신화를 믿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연인 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라면 내 시간과 감정을 비롯한 적극적인 노력을 연인에게 쏟는 동시에 내 사랑을 적극적으로 보살펴야만 한다. 이처럼 내가 품어야 할 꿈과 진로 역시 끊임없이 보살피면서 가꾸어 나갈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되는대로 살자, 난 모르겠으니 어떻게 하든 뭐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소극적인 자세는 그저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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