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상반기를 관통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은 '미스터 트롯'과 '싹쓰리'이지 않을까 싶다. 트로트와 90년대 가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둘 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중가요 장르였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한물 간 콘텐츠로 밀려나버렸다. 하지만 이 비주류 문화는 기성세대의 복고 감성을 자극했다. 반면에 신세대에겐 다소 생소했던 이 문화가 새로움을 좇는 그들의 수요에 따라 뉴트로(New-tro) 문화의 소비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뉴트로(New-Tro)란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 문화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말한다. 레트로가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과거에 유행했던 것을 다시 꺼내 추억을 느끼는 것이라면, 뉴트로는 같은 과거의 것이어도 이걸 즐기는 신세대에겐 새롭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old와 new가 단절되어있지 않고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뉴트로 문화는 '온고지신'의 현대식 재현이 아닐까?
과학의 온고지신 ; 빛의 이중성
과거에 빛은 당연히 파동의 일종이었다.
빛이 파동이라고 최초로 주장한 공식적인 인물은 17세기 말 네덜란드의 과학자 하위헌스다. 이때는 심증만 있었지 물증은 없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영국의 물리학자 토머스 영은 이중실틈 간섭 실험 결과라는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여 빛이 파동이라는 이론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게 빛의 정체가 파동이라 못박아지고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됐다.
그러나 그 평화는 딱 1세기만에 깨지게 되었다.
금속 표면에 빛을 쪼였을 때 전자가 튀어나왔다. 이렇게 발생한 전자의 흐름을 광전류라고 한다. 이 전류값이 크면 전자의 최대 운동 에너지가 크다는 거고, 전류값이 작다면 전자의 최대 운동 에너지가 작다는 걸 의미한다. 금속이 흡수한 빛 에너지가 전자의 운동 에너지로 전환된다고 생각하면 이 현상은 그리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실험적 사실들로부터 빛이 파동이라는 대전제에 큰 모순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첫 번째, 광전자의 최대 운동에너지는 입사하는 빛의 세기와는 무관하다.
이는 빛의 세기가 강할수록 전자가 더 큰 운동 에너지를 갖는다는 파동론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결과이다. 파동론에 따르면 빛의 세기가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빛 파동의 진폭이 크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일반 파도보다 해일이 위험하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실험 결과는 해일이 쳐도 끄떡없는 건물이 일반 파도에 와그리 쓰러지는 상식 밖의 일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 광전자의 최대 운동 에너지가 빛의 진동수에 따라 증가함을 발견했다.
이는 해일이든 파도든 파고와 상관없이 넘실거리는 횟수가 적은 해일보다 넘실거리는 횟수가 많은 파도가 건물을 박살낼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두 번째, 빛이 조사되는 순간에 광전자가 즉시 방출된다.
빛이 금속 면적에 흡수가 되어야 전자가 튀어나온다. 이 빛 에너지가 면적에 골고루 흡수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면적이 엄청나게 넓은 금속과 면적이 엄청나게 좁은 금속에 동일한 빛을 쪼여주었을 때 상식대로라면 좁은 금속에서 먼저 전자가 튀어나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자는 면적의 크기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듯이 면적에 상관없이 빛을 쬐어주는 동시에 튀어나온다.
이처럼 빛의 파동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두 가지의 수수께끼를 자신만의 이론으로 설명하여 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빛과 물질 사이의 순간적인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선 파동론이 아닌 다른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막스 플랑크의 아이디어에 착안하여 빛이 불연속적인 에너지를 갖는 알갱이의 집합체라고 가정했다. 즉, 빛을 파동이 아닌 입자로 본 거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광양자라는 알갱이로 이루어졌다고 보았으며, 이 알갱이가 가지는 에너지는 진동수에 비례한다고 가정했다.
E = hf ( E: 광양자의 에너지, h: 플랑크 상수, f: 빛의 진동수 )
이 광양자론에 따르면 광양자의 에너지가 진동수에 비례하기 때문에 광양자랑 상호작용하는 전자의 최대 운동 에너지가 진동수에 비례해서 증가함을 설명할 수 있고, 시간 지연없이 전자가 튀어나옴을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빛을 입자로 본다면 빛의 파동적인 현상을 절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빛이 정말 입자라면 뚫려있는 구멍(이중 실틈)근처만 엄청 밝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빛은 간섭하기 때문에 밝고 어두운 무늬가 스크린에 교차되어 나타난다. 이는 명백히 빛이 파동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빛이 물질과 상호작용할 때는 분명히 입자적 성질을 띠었다.
결국 과학자들은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빛은 어떤 때는 파동성을 띠고, 또 다른 때는 입자성을 띤다. 즉, 빛은 이중적인 성질을 띠는 정체로 귀결되었다. 파동이라 여겨졌던 빛을 입자로 보는 새로운 인식은 빛의 정체성을 하나로만 정하지 않도록 했다. 이는 옛것을 새롭게 익히는 과학의 뉴트로이자 온고지신의 발현이다.
관측자와 물체의 상대적인 움직임이 어떤지에 따라 물체의 속도는 다르게 인식된다.
음원과 관측자의 상대적인 움직임이 어떤지에 따라 관측자가 듣는 소리의 진동수가 다르게 인식된다.
이처럼 물체의 속도와 음원의 진동수는 본질적으로 고정된 값이지만 상대적인 움직임이 어떠냐에 따라 관측값은 확연하게 달라진다.
아침 출근길에 겪었던 일이다. 지하철 공사 구간이라 중앙 분리선에 임시 외벽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날은 창문을 연 채로 운전하고 있어서 그 구간을 지나는 순간 쌩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움직이니까 차와 외벽 간 공기 흐름이 발생하고 그 공기 흐름을 청각 기관이 감지한 것인데, 순간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가 정지해 있었다면 아무 소리도 안들렸을텐데.."
똑같은 임시 외벽인데 내가 움직이냐 정지하냐에 따라서 소리가 들리냐 안 들리냐가 결정되었다. 본질은 가만히 정지해 있는 외벽이었는데, 나와 외벽의 상대적 움직임이 만드는 현상을 내 청각이 인지했다. 상대속도, 도플러 효과, 아침 출근길의 경험 모두 감각에 의존하는 경험이며, 이 감각의 최종 수용 기관은 인간의 '뇌'다. 빛도 어떻게 '보냐'에 따라 파동인지 입자인지 결정되는 것처럼 순전히 우리 감각(시각)에 의존한다. 어쩌면 빛이라는 것도 사실 본질적으로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상대적인 상황에 따라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빛의 본질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감각의 동굴을 벗어나 빛의 이데아에 접근하는 방법은 없을까? 감각에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빛의 본질에 접근하는 건 정녕 불가능할까? 우리의 감각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빛의 새로운 정체성이란 무얼까?
싹쓰리의 '다시 여기 바닷가'는 분명 댄스 장르라 들으면 즐겁고 신난데 왠지 슬프다. 젊은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트리거로서 자신을 투영하게 만든다. 젊은 시절을 회상할 때 두 가지 모호한 감정이 들게 마련이다. 찬란하지만 불안했고, 반갑지만 왠지 후회되고,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양립하기 힘든 감정의 모순이 슬프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양립할 수 없는 입자적 성질과 파동적 성질을 모두 지닌 빛의 모순은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거 같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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