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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토리텔링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열역학 제 2법칙

by 사이언스토리텔러 2020.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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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는 모자를 만들어 파는 가업을 물려받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주인공이다. "그게 언니 꿈인 거야?"라고 묻는 동생의 말에 단지 "글쎄... 나는 장녀니까"라는 말로 뭉뚱그리는 소피에게 동생은 '자기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정하는 거다.'라는 말로 소피에게 충고를 한다. 작 중 초반의 소피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수동적인 삶을 사는,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 주인공으로 묘사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소피에게 황야의 마녀는 세월의 흐름을 직격으로 맞게 하여 꼬부랑 할머니가 되는 저주를 내린다. '하울에게 부탁하여 저주를 풀어 보든지...'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황야의 마녀는 떠나버리고 소피는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기 위해 하울을 찾아 떠나게 된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너저분한 난장판 그 자체의 하울의 집을 사람 사는 집으로 만드는 러브하우스, 부모가 없는 캘시퍼와 마르크를 보살피면서, 멀리서 보았을 때는 한없이 멋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열등감과 공포심으로 가득 찬 나약하기 그지없는 하울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소피 맘의 육아일기 느낌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다시 보고 또 보고, 보면 볼수록 내가 놓쳤던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영화 속 숨은 장치들 그리고 복선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영화가 바로 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영화 중반에 소피의 얼굴이 저주가 풀린 거 마냥 젊었을 때로 돌아오는 순간이 많았다. 하울에 대한 커져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조금씩 표현하는 순간이라든지 하울을 대변해 국왕에게 전쟁과 하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얼굴이 젊어졌고, 하울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는 순간과 하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의 소피 얼굴은 너무나도 앳되어 보였다. 저주를 받기 전 뭔가 촌스러웠던 얼굴의 소피는 영화 후반으로 가서는 네이비와 백발이 잘받는 쿨톤 미녀가 되었다.


왜 작가는 저주받아 늙어버린 소피의 얼굴을 특정 순간에만 젊게 표현했을까? 여기에는 어떤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을 옭아매는 상황을 바꾸려 하지도 않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수동적인 삶이야말로 이미 죽어버린 삶이라는 것을 소피의 늙은 얼굴로 작가는 꼬집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반면에 본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주체적으로 살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의 삶이야말로 젊게 사는 비결임을 작가는 주장하고 싶었을까?

 

가역 과정과  비가역 과정

어떤 계의 상태가 원래와는 다른 상태가 되었을 때, 그 계가 스스로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를 비가역 과정이라 한다. 예를 들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볼링핀에 볼링공을 굴려본다고 하자. 공에 맞은 볼링핀은 무작위한 방향으로 흩트러진다. 이 과정은 비가역 과정인데, 흩트러져 있는 볼링핀들이 스스로 모여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경우는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지면 부서지고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물에 떨어진 잉크는 무작위 한 방향으로 퍼져 나가기 마련이고, 열은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달된다. 이처럼 자연은 무질서한 상태를 선호하고 그러한 자연의 방향성을 우리는 엔트로피라고 한다. 즉, 자연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을 선호한다. 반대로 계가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가역 과정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비가역 과정들을 가역 과정처럼 꾸밀 수는 있다. 쓰러져있는 볼링공을 하나하나 우리가 손으로 옮겨 정리하면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고, 에어컨을 틀면 후덥지근한 장소가 시원해지고, 물에 떨어진 잉크를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도 있다.

 

↓섞인 물감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 

youtu.be/y9vvXtHrV44

볼링핀을 옮기는 것, 에어컨의 작동, 물감 실험 모두 막연하게 본다면 열역학 제 2법칙(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자연은 변한다.)을 위배하는 것 같지만 모두 추가적인 외부 조작이 가해진 상황들이다. 그 외부 조작까지 고려한 전체 계 입장에서 따졌을 때의 전체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다만 우리 눈에는 비가역 과정이 가역 과정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치 비가역 과정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를 먹게 되고, 그 연령대에 지켜야만 하는 사회적 미덕이 있다는 듯이 거기에 구속되어 아등바등 살아가는 그러한 삶, 10대는 이래야 되고, 20대는 저래야 되고, 30대니까 이걸 하면 추태가 될 거 같은 괜한 조바심을 가지며 남 눈치를 보면서 산다. 하지만 어질러진 볼링핀을 내 손으로 직접 정리하듯이, 구속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솔직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소피의 얼굴이 다시 젊어진 것처럼 때로는 인생을 가역 과정처럼 살 수 있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 스위치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의 힌트를 영화가 준 것이다.

 


이렇게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물이 산 아래 인간 세상으로 흘러가서 결국 목욕하고 밥 짓고 화장실 닦는 데 쓰인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깝기 그지없다. 오염된 물은 어디로 흘러갈까? 일부는 태양 복사 에너지에 의해 증발하는 과정에서 자정 작용이 일어나고 마지막에는 비와 눈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졌다가 바다로 유입된다. 나머지 물은 진흙 속으로 스며들어 토양을 통해 걸러지게 돼 지하의 물길을 따라 바다로 모여든다. 산 아래로의 여정을 마친 물은 정적이고 광활한 자연의 보고인 바다에 다다르게 되고, 그의 일부분이 되면서 또 다른 계기가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린다 이 반복되는 사이클은 영화의 '인생의 회전목마'를 연상시킨다.

 

인간의 성장도 이러한 물의 순환과 같지 않을까? 경쾌하게 졸졸 흐르는 샘물처럼 누구에게나 불순물 없이 깨끗한 인생의 출발점이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오염되고 심하게 더러워진 하수도처럼 인생의 부침을 겪고 쓰디쓴 성장 과정을 맛본다. 그렇게 흘러가던 물길이 종국에는 드넓은 바다에 이르듯 마지막에는 청정하고 자유로운 인생의 종점으로 돌아간다.

 

숱한 연애들을 해오면서 가끔은 아무것도 몰라서 모든 게 새로웠었던 첫 연애를 했을 때의 순수한 내가 그리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순수했던 첫 연애를 했던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닳고 닳은 사람이 된 것일까? 아무 것도 몰라서 실수만 했었던 시절을 순수했던 것으로 착각하는 것 아닌가? 어쩌면 다른 연애를 하지 않았었다면 지금까지도 몰랐었을 것이다. 과거의 연애만큼 소극적이고 이기적이며,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자만심 가득한 연애가 없었다는 것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지금 내 주위 사람들과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그러지 않다는 것을 경험한 이후에는 '지금 이 사람들도 나중에는 과거의 사람들처럼 그저 스쳐 지나가겠지'라는 염세적인 생각을 거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 내 곁의 사람들에게 더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연애를 비롯한 인간관계가 이렇게 어렵고 심오한 일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던 시절이었다. 사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꿈을 위해 달려 나갈 때였었다. 그러니 모를 수밖에 없었고, 내가 아는 만큼만 보였을 뿐이다. '순수'가 무엇일까? 아무것도 몰라 모든 게 처음이었던 것이 '순수'일까? 나이를 먹어가며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순수가 정말 탁해진 것일까? 오히려 과거에 내가 이만큼 몰랐었다는 것을 인생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지 않을까? 내가 생각한 순수가 진정한 순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던 계기가 인생 경험이지 않을까?

 

과거의 행적 자체를 내 순수를 더럽힌 것으로만 치부하고 방치해버렸다면 위와 같은 깨달음은 나에게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가역 과정을 돌고 도는 회전목마와 같은 가역 과정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반성 및 자아 성찰과 같은 인생의 자정 작용이 필요하고, 이런 성장 과정 속에서 점점 성숙해지는 것이 겉으로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순박하고 둥글둥글한 천진함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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