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산맥에서 전해오는 우화인데 산불이 나서 다들 도망을 가지만, 크리킨디라는 조그만 벌새가 계속 불을 끄기 위해서 물을 길어다 날랐습니다.
다들 기가 막혀서 크리킨디에게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어서 도망가라고들 하죠. 그랬더니 크리킨디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뿐이야."
'나'라는 사람은 이렇다고 칼로 무자르듯이 정의할 수 있는가?
착하고 부지런함이 항상 유지된다고 생각하나? 반대로 비열하고 이기적이고 배려없다고 말할 수 있는 형질도 항상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좋지 않은 컨디션때문에 예민한 날에는 착하고 부지런하기가 보통의 날보다는 힘들기 마련이며, 기분 좋은 소식에 한껏 고양된 에너제틱한 날에는 넓은 아량으로 모든 짜증스러운 것들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가 쉽다.
이처럼 사람은 외부 변수(상황, 컨디션, 기타 등등)의 영향을 받는, 자연 및 우주 삼라만상에 의지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모든 갈등의 근본 원인은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집착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있고, 내가 살아야 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고 너는 틀렸다, 이런 생각에서 이기심이 발동하고 그 이기심때문에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이고 심지어 그 생각은 나 자신을 괴롭히기도 한다.
'나'를 철저하게 독립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은 '내'가 항상성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며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 날 계획했던 하루의 일과를 내가 조금이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나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평가절하하게 된다.
이런 날이 있다.
술떡이 되어 다음날 머리가 빙빙 돌고 속이 메스꺼워 고통스러운데 뭔가 해야될 거 같다는 중압감이 나 자신을 몰아붙인다. 마음은 태산같지만 전날 과음으로 인해 떡이 된 내 몸은 따라가 주질 못하고 나 스스로 몰아붙이기만 하니 일은 일대로 되지 않고 나를 스스로 질책하느라 내 정신적 에너지마저 고갈되어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맞닥뜨리게 된다.
슬럼프나 무기력증이 찾아올 때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앞서가지만 몸이 따라가주질 못하니 나 자신에게 엄청난 실망을 하게 된다.
가득 찬 열정으로 계획에 따라 뭐든 잘 해나갔던 과거의 '나', 컨디션이 좋지 않고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 '나' 가 똑같나?
전혀 그렇지 않다. 나 자신을 항상 100만큼의 효율을 내는 로봇으로 취급하여 내가 술떡이 되든, 무기력증에 빠졌든 개의치 않고 그저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있다'라는 것에 가치를 두고 나를 다독여주면 안될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뿐이야." 라고 말하는 크리킨디와 같은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여유를 가지며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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