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디즈니&픽사 군단은 사람이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클리셰를 버리고, 되려 인격을 구성하는 감정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사람을 배경으로 깔아버리는 기발한 발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는 바로 2015년에 개봉한 '인사이드 아웃'이다.
나는 영화의 주인공이 기쁨이인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 나오는 기쁨이는 자신을 라일리와 동격화하면서 다른 감정들이 뭔가를 하려고 하면 뭐든 족족 막아댔었다. 마치 라일리의 부모인 마냥.
특히 기쁨이는 슬픔이 하는 모든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 나도 영화를 처음 볼 때 기쁨이처럼 슬픔이를 트롤취급했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러한 슬픔을 배격하려는 기쁨이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트롤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영화는 기쁨과 슬픔 분노 까칠함 이러한 내면의 모든 감정들은 우열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항상 기뻐할 것도 없고, 슬픔과 우울함을 무시할 이유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다양한 감정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진정한 내 자아가 성장하며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자보다 작은 입자의 위치를 알고 싶어 빛을 비추면 빛과 입자가 서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정확한 입자의 위치 대신 확률만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원자보다 작은 미시 세계에서는 결정적 단서보다는 확실하지 않은 확률 정보만 알 수 있고, 이러한 미시 세계의 낯선 작동 체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불확정성 원리'이다.
그리고 이 '불확정성 원리'가 양자역학의 기저에 깔려 있다.
세상 어느 것도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한다'는 양자역학의 기본 가정이 실제로는 온 우주를 움직이고 작동시켜 온 기본 원리였던 셈이다. 이처럼 우리를 비롯한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각자의 의미를 가진다.
인간(人間)이란 말부터가 '사람 사이'이다. 즉 인간은 서로 상호작용을 해야만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철저히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러한 수요에 힘입어 수렵 생활을 해오던 인간은 상호 작용하는 범위를 점점 늘려가며 사회적 체감 거리를 좁혀갔다. 씨족에서 부족 더 나아가 세계화의 진전으로 글로벌 사회를 이룩하며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빠르게 소통하고, 지구의 어디로든 하루 안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있었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만 급급했던 인류는 변화와 진보의 빠른 속도로 인해 안정감에 문제가 생긴 지도 몰랐다. 기술 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이제 그 폐단이 심각하게 노출되고 있다. 인류가 기술에 잠식되어 사는 듯한 모습을 일상생활 속에서 자주 마주한다.
SNS를 비롯한 여러 소셜 컨텐츠는 더 많은 사람과의 사회적 교류를 원하는 수요와 맞물려 엄청나게 발전하였지만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오게 되는 각종 부작용들에 의해서 오히려 사람 간의 사회적 거리가 멀어지게 돼버렸다.
그러던 와중에 사회적 거리를 더 멀어지게 만든 비극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과학과 문명으로 자만하던 인류 앞에 난데없이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등장한 것이다.
인류를 구원해 줄 '빛'을 만드는 공장 '방사광가속기'
과학 기술이 인간에게 미래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희망에 금이 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우린 과학과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때를 떠올려보면, 당시 수백만의 감염자 발생에도 코로나19와 달리 대규모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그것은 '타미플루'라는 치료제 때문이었다. 이 치료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유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세포의 단백질 결합 구조가 밝혀지면서 바로 치료제 개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외피에 존재하는 당단백질과 인간 세포의 수용체가 서로 인식하면 세포는 세포막을 열어 바이러스를 삼키는 작용을 한다. 이 과정이 바로 감염이고, 세포 안에 들어간 바이러스는 자신의 유전자 물질을 여러 개 복제한 후 세포를 파괴하며 탈출한다. '타미플루'는 이 과정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인류는 어떻게 단백질 분자가 세포와 반응하는 동작을 알았을까? 여기에는 바로 '방사광가속기'가 큰 역할을 한다. 당시 제약사는 방사광가속기를 통해 단백질의 구조와 결합 원리를 밝혔다. 그렇다면 '방사광가속기'는 무엇일까?
'방사광가속기'는 일종의 '빛 공장'이다. 전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켜 전자 자체의 파동적 특성으로 생화학적 구조를 파악하기도 하고, 가속 운동하는 전자가 방출하는 X선이라는 방사광 형태의 빛을 가지고도 원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물리 화학적 구조와 반응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사광의 활용은 의학 분야뿐 아니라 모든 과학과 산업 분야에서 필수다.
최근 방사광가속기 활용도를 조사한 결과, 반도체나 IT분야뿐만 아니라 생명과학 분야와 신약개발에 이르는 바이오 분야의 수요도 예상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은 문제에 대처하려는 연구 수요가 많다는 뜻이다.
물론 국내에도 '방사광가속기'가 있다. 하지만 오래전 포항의 한 대학에 설치된 가속기는 이미 이용 빈도가 포화되었고 빛의 품질도 좋지 않아서 사실상 국제 경쟁력을 상실했다. 전 세계 선진국의 방사광가속기들은 대부분 고품질 빛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가까운 일본만 해도 이런 장치가 8대나 있다. 일본이 과학강국이 된 이유는 그들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기초과학이 견고한 데다 인프라가 잘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시장 1위인 대만 TSMC가 실적을 기록하며 2위인 삼성전자와 격차를 더욱 벌렸다. 대만에도 '방사광가속기'가 2대나 있고, 그 시설을 중심으로 4개의 대형 TSMC랩은 물론 수천 개의 반도체 업체들이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한다.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도 이미 여러 대를 확보하고 있다.
우리도 좋은 품질의 빛을 만드는 방사광가속기를 가져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충북 오창에 신규 방사광가속기 구축이 결정됐다. (설립 지역을 두고 전남 나주와 경합을 벌였었는데, 아쉽게도 충북 오창으로 결정되어서 개인적으로 씁쓸함.)
우리는 기술 발전의 가속화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도덕적 가치관과의 괴리에서 혼란스러워했었다.이제 우리는 코로나 19를 계기로 올바른 상호작용에 기인한 사회적 교류를 위해 과거의 실수를 되돌아 봄과 동시에 미래를 내다보면서 온당한 도덕적 관념을 신장시켜야만 한다.
유럽에서의 흑사병 유행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발흥시킨 직접적 원인이라는 게 하나의 정설이다. 감염증에 의한 죽음의 공포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르네상스를 낳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코로나 19로 고통받는 우리의 눈 앞에 2차 르네상스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방사광가속기'가 만드는 빛이 장막에 가려진 2차 르네상스를 밝게 비춰주지 않을까?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숲속 나무들은 적당한 사이를 둬야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잘 자라듯 사람도 아름다운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특히나 지금은 더 거리두기를 실천해야할 때임에 틀림없다.
레바논 출신의 미국 시인 칼릴 지브란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고 조언했다.
사람이든 나무든 밝은 햇빛을 받고 잘 자라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간격이 필요하다. 인류를 구원해줄 '방사광가속기'가 만드는 빛이 우리 사이를 스며들 때까지 서로 아름다운 간격을 잘 유지하도록 하자.
「참고자료 및 문헌」
생각통 칼럼 - 디지털 르네상스와 코로나 19
김병민 - 숨은 과학
고두현 칼럼 - 숲의 시인이 전해준 말…"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각종 이미지 출처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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