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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장점과 단점에 대한 고찰 -자기역량 계발보다 사회적 그물망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하는 논리적 근거-

by 사이언스토리텔러 2019.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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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창의력이 있어 무엇을 배우면 곧잘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학습이 느리고 우둔한 아이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앞서 언급한 진화론의 원리대로라면 발육이 우수하고 IQ가 높은 사람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해야 하지 않을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세계적으로 우생학이 유행했다. 사실상 우생학의 기본 논리는 다소 냉혹한 면이 있다. 지금 인류는 현대사회로 진입했고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크게 개선되었다. 자연선택대로면 우둔한 인간은 원래 굶어 죽고 도태되어야 하지만 이제는 죽지 않고 운 좋게도 냉혹한 '자연선택의 칼날'을 피해가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살아남아도 되지만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

아이를 낳을 권리는 저 똑똑하고 우수한 이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몇 세대가 지나면 인류 전체의 수준이 높아지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생학 또는 적극적 우생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로서는 이 논리가 얼마나 참혹하고 비인간적이며 종족 차별적인지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상반기에 독일 나치가 펼친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우생학을 주장하는 과학자가 모두 나치주의를 신봉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과학적인 태도로 신중히 우생학을 바라봤다. 오늘날에는 이미 타당성을 잃었지만 당시 과학자들은 전인류적 정의감에 불타 우생학을 연구했다.

그중 루이스 터먼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독일인도 나치도 아닌 미국인이었다. 게다가 그가 평생 한 일은 사업성이 높은 IQ 테스트다. 

... 터먼은 임종을 앞두고 우리에게 깊이 새겨둘 만한 말을 남겼다. "IQ와 사회적 성취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이 유전자를 조작해 사람의 특정 형질을 바꾸려고 해도, 자르고 싶은 곳을 정확하게 잘라내는 메스처럼 딱 떨어지게 조작할 수 없다. 유전자는 인간의 내재된 특질이며 겉으로 표출되는 형질 또한 매우 다양하다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는 지금 현대 과학의 수준에 국한되어 있기에 그 전체에서 한두 가지밖에 볼 수 없으며 그 외 어떤 다른 위험이 있는지는 사실상 알지 못한다.

한 예로 테이색스병이라는 유전병이 있다. 이 병에 걸린 소아는 두세 살에 지능 발육이 중단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많은 유전병 학과의 학자들이 이 병을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이 병이 진화론의 원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수억 년간의 진화 과정에서 이러한 질병의 유전자를 가진 인간은 이미 도태되어 사라졌어야 하는데 어떻게 아직도 현대사회에 남아 있는 것일까?

나중에 나온 연구 결과에 따르면 테이색스병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발병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폐결핵 간균에 저항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

진화란 무엇인가? 진화란 두 가지 안 좋은 상황 중에서 손실이 적은 쪽을 취하는 것이고,  심한 경우 여러 안 좋은 상황에서 손실이 가장 적은 쪽을 택하는 것이다. 폐결핵이 자주 발생했을 당시 이런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폐결핵 저항 능력이 뛰어났기에 테이색스병에 걸릴 위험을 안고 가는 편이 더 타산이 맞았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유전자는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마트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 오는 것처럼 임의로 필요한 것을 가지고 나오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장점을 취하고 싶으면 어쩔 수 없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단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단점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다 알 수 없다. 또 단점을 없애다보면 장점마저 한꺼번에 사라질 수 있다. 

 


테이색스병은 정말 수만 가지중 하나의 사례가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적어도 인류가 진화하는 데 있어서 선택한 방향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과 인간이 진화할 때 정말 엄청나게 많은 변수들이 통일된 방향으로, 생존에 최선인 방향으로 선택되어 종 잡을 수 없게 결론이 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인류 하나하나가 굉장히 다양한 성격과 형질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나쁜 성격과 좋은 성격으로 나누는 현재의 기준은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에 맞춰 살기 때문에 뭐가 좋고 나쁜지 교육받고 살아온 것이지 자연의 섭리라는 안경을 쓰고 본다면 지금의 도덕적 잣대가 완전히 맞다고 말할 수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내 성격의 결함이 내 성격의 장점을 서포트해줄 수도 있고, 내 성격의 장점이 내 성격의 결함을 서포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인가? 나를 곧이 곧대로 나로써 인정하는 것인가? 나의 인류학적 생존 본능에 의해 셋팅된 단점을 필히 없애야 하는 악덕으로 여기지 말고 감싸주면서 다독여주는 자기애를 발현하라는 말인가? 내 역량의 결함을 탓하지 말고 한 분야의 결함이 다른 분야의 일취월장함을 서포트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부족한 역량을 타인으로부터 충족하는 방향으로 자기 발전하라는 말인가? 그리하여 인간의 사회적 성취는 IQ와 같은 자기 역량만이 아닌 그물망에 의해 크게 영향받는다는 책 문단의 결론에 부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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