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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토리텔링

[섞인 물감 되돌리기] 삶을 되돌리다.

by 사이언스토리텔러 202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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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의 웅덩이에 고여있는 푸른 빛깔의 물은 마음을 청량하게 만든다. 이렇게 맑은 물이 산 아래 인간 세상으로 흘러가서 목욕하고 밥 짓고 화장실 닦는 데만 쓰인다고 생각하니 아깝기 그지없다. 그렇게 오염된 물은 어디로 흘러갈까?

일부는 태양의 힘을 빌어 하늘에 머물러 있다가 비와 눈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졌다가 바다로 유입된다. 일부는 진흙 속으로 스며들어 토양을 통해 걸러지게 돼 지하의 물길을 따라 바다로 모여든다. 결국 산 아래로의 여정을 마친 물은 정적이고 광활한 자연의 보고인 바다에 다다르게 되고, 바다의 일부분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계기가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린다. 

인간의 성장도 이러한 물의 순환과 같다. 경쾌하게 졸졸 흐르는 샘물처럼 누구에게나 불순물 없이 깨끗한 인생의 출발점이 있었다. 오염되고 심하게 더러워진 하수도처럼 인생의 부침을 겪고 쓰디쓴 성장 과정을 맛본다. 그렇게 흘러가던 물길이 종국에는 드넓은 바다에 이르듯 마지막에는 청정하고 자유로운 인생의 종점에 닿게 되며 새로운 시작을 기다린다.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인생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인생도 뱅글뱅글 돌아가는 회전목마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한 교훈을 알려주는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소개한다.


https://youtu.be/UQgVt8EQfkY

소피는 모자를 만들어 파는 가업을 물려받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주인공이다. "그게 언니 꿈인 거야?"라고 묻는 동생의 말에 단지 "글쎄... 나는 장녀니까"라는 말로 뭉뚱그리는 소피에게 동생은 '자기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정하는 거다.'라는 말로 소피에게 충고를 한다. 작 중 초반의 소피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수동적인 삶을 사는,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 주인공으로 묘사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소피에게 황야의 마녀는 세월의 흐름을 직격으로 맞게 하여 꼬부랑 할머니가 되는 저주를 내린다. '하울에게 부탁하여 저주를 풀어 보든지...'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황야의 마녀는 떠나버리고 소피는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기 위해 하울을 찾아 떠나게 된다. 

영화를 보면 잠깐잠깐 소피의 얼굴이 회춘하는 순간이 많았다. 하울을 향해 커져가는 감정을 조금씩 표현하는 순간이라든지, 하울을 대변하여 국왕에게 전쟁과 하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얼굴이 젊어졌고, 하울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는 순간과 하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의 소피 얼굴은 너무나도 앳되어 보였다. 저주를 받기 전 뭔가 촌스러웠던 얼굴의 소피는 영화 후반으로 가서는 네이비와 백발이 잘 받는 쿨톤 미녀가 되어 있었다.


작가는 왜 늙어버린 소피의 얼굴을 특정 순간에만 젊게 표현했을까? 여기에는 어떤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을 옭아매는 상황을 바꾸려 하지도 않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수동적인 삶이야말로 이미 죽어버린 삶이라는 것을 소피의 늙은 얼굴로 작가는 꼬집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반면에 본인의 감정을 보살피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주체적으로 표현하는 삶이야말로 살아있는 삶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과정, 비가역 과정

흘러가는 세월은 얼굴에 주름이라는 골짜기를 만들고, 볼링공을 맞는 볼링핀과 깨진 유리잔의 파편은 마음대로 흐트러지고, 섞어지는 물감이 종잡을 수 없는 색깔로 변하는 이 모든 과정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하지만 이들을 반대로 되돌리는 건 곤란하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과정들이 '비가역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변화가 생겼을 때,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원래 상태로 스스로 돌아가지 못하는 과정을 '비가역 과정'이라 한다. 쓰러진 볼링핀이 스스로 정렬되고, 깨진 유리컵이 스스로 복원되고, 얼굴의 주름이 스스로 사라지고, 섞인 물감이 섞이기 전으로 분리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섞인 물감이 분리되는 기현상이 있다. 이번 시간에는 이를 확인해본다.

 

youtu.be/y9vvXtHrV44

이처럼 외부 조작 및 에너지가 시스템에 개입되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그 말은 즉슨 비가역 과정을 부정하는 현상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쓰러진 볼링핀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으면 내 에너지를 쏟아부어 가지런히 정리하면 된다. 유리컵을 복원하고 싶으면 파편에 열을 가해 녹여서 내 에너지를 쏟아부어 공예를 하면 된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연령대에 지켜야만 하는 사회적 미덕이 있다는 듯이 거기에 구속되어 아등바등 살아간다. 10대는 이래야 되고 20대는 저래야 되고 30대는 어쩌고 저쩌고 등등 남들이 정한 굴레에 얽매이며 나를 점점 잃어간다. 안타깝게도 그런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지 않나 반성하게 된다.

 

하지만 어질러진 볼링핀을 내 손으로 직접 정리하여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처럼 죽어가는 나의 삶에도 생기를 깃들게 할 수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외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솔직하며 주체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소피, 그 내면의 변화를 얼굴의 변화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함으로써 인생을 가역 과정처럼 살 수 있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 스위치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힌트를 영화가 가르쳐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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