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와 스토리 그리고 발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육지의 왕자를 만나기 위하여 마녀에게 자신의 영혼까지 팔지만, 결국에는 물거품이 되고 마는 인어의 애절한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한 번도 바다 위를 구경해 보지 못한 인어공주는 자신의 생일에 물 밖을 구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바다 위 구경을 나선다. 공주는 마침 바다 위를 항해 중이던 왕자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때 폭풍이 일어 왕자가 탄 배는 침몰하고 공주가 정신을 잃은 왕자를 구해낸다. 인어공주는 왕자의 곁에 있고 싶어서 자신의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는 대신 사람의 몸을 얻어 왕궁에 들어가서 시녀가 된다. 그러나 왕자는 벙어리인 인어공주가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게 되고, 낙심한 인어공주는 슬퍼하며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죽게 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월트 디즈니의 '인어공주' 주인공 애리얼은 다소 부침을 겪긴 했지만 왕자의 사랑을 쟁취하면서 원작과 달리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원작과 리메이크의 결말은 다소 다르지만 인어공주 스토리를 관통하는 주제는 똑같다.
"넌 목소리만 주면 돼. 그럼 내가 널 사람으로 만들어줄게."
근대 유럽에서 거리낌 없이 말하는 여자는 길들여야 할 말괄량이로 간주됐다. 당시에 말 많은 여자, 특히 인어공주의 아버지가 강요하는 규율 같은 남성의 지배 구조에 복종하지 않는 여자는 징계를 받았다. 여성의 목소리를 악의 근원으로 보고 이를 길들이려 했다. 여성의 혀에서 나오는 사상과 잠재력을 억누르려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마녀가 인어공주를 인간으로 만들어주겠다며 그 대가로 목소리를 요구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다.
왕자는 인어공주의 목소리, 그것도 그녀의 노랫소리에 끌렸다. 그가 그녀의 목소리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건, 그녀를 그녀답게 하는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거다. 인어공주의 목소리는 그녀로 하여금 자신감과 외향적인 성격, 호기심과 진정한 자아를 표출하는 수단이었다.
'인어공주'는 우리에게 내 목소리로 내 말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큰 행운을 등한시 말라는 교훈을 줌과 동시에 목소리란 '나 다움'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기 위한 기본 수단으로써 그러한 목소리를 상실하면 나 자신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를 날리고 있다.
이제 여러분 스스로가 내 목소리로 자기 자신의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살고 있는지 반성해볼 때가 왔다.
나를 표현하는 콘텐츠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은 제2차 산업혁명 시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사진기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사진기가 나왔을 때 많은 화가들이 위기감을 느꼈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사진기보다 똑같이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 미술사에서 19세기는 사진기가 갖지 못하는 화가만의 경쟁력이 무엇일지, 화가는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 시기였다.
그러한 고민은 화가들이 그동안 초상화를 그리는 등의 공리적 목적에서 벗어나 그림을 통해 사물과 현상의 겉모습 안에 감춰진 진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게끔 만들었다. 이는 미술 자체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산업 혁명을 지나고 난 이후의 시기에 활동했던 고흐, 뭉크, 피카소, 샤갈은 그들 각자가 살고 있던 시대상의 모순과 배경을 자신만의 방식과 감정으로 표현했고, 그렇게 탄생한 그림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지나간 역사를 가르쳐 줬고, 많은 영감을 제공했다. 그림이 곧 그들에게 '목소리'였다. 그림은 그들이 그들임을 증명하는 자기표현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의 소비자들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표현 방식과 콘텐츠에 감동했다. 지금처럼 영화, 드라마, 유튜브와 같이 시각적인 대중 매체가 전무했던 시절, 그들은 유일하게 이미지 콘텐츠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지금의 인플루언서(유튜버, 배우, 가수 등)와 다를 바 없었다. 현재 인플루언서가 미디어나 매체(웹툰,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를 이용하여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듯이 화가들은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가치와 의미를 깨닫도록 하였다.
결국 사진기가 나온 이후에도 화가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림이 사진기가 찍는 풍경만큼 실제와 똑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만의 독자적인 표현방식으로 세상을 그려낸 작품에 의미를 부여했고, 소비자들은 그를 소비했기에 그림은 사진과 다른 그것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였다.
스토리의 힘
자동차는 사람보다 빠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올림픽에서 달리기 경주를 할까? 사람보다 빠른 기계가 있는데 굳이 사람끼리 뛰게 해서 더 빠른 사람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림보다 사물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사진기가 등장했음에도 그림이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를 말이다. 인간은 매사 빠르고 효율적인 것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인간은 비능률의 틈새에 끼어 간과해왔던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소함을 보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그 의미를 소비하길 원한다.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사소한 걸 보물로 탈바꿈하는 힘은 '이야기'에 있다. 경주의 승리는 승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승리를 위해 자신을 불사른 자가 흘린 피와 땀 그리고 눈물에 대한 보상이자 그 열매다. 그런 까닭에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극의 순간은 우리를 흥분시킨다. 경주 참가를 위해 4년 혹은 그 이상, 선수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그들의 처절하고 절실했던 이야기에 스며들어있고 우리는 그 이야기에 열광하며 그들을 응원하고 감동하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선수들의 이야기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계속 꾸준히 소비되고 있다.
이처럼 이야기의 힘은 위대하다. 그리고 이야기의 힘은 온전히 나만의 표현 방식을 통해 전달될 때 더 막강해진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가수나 유튜버 및 배우를 떠올려보라. 그들을 왜 좋아하나? 글읽기를 잠시 접어두고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 이유를 선뜻 말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감히 그 답에 대한 힌트를 말해주겠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 표현 방식이 목소리든 춤이든 뭐가 됐든, 그 표현 방식엔 그들만의 정체성이 녹아있다. 방탄소년단과 아이유,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목소리와 춤)으로 표현해 대중에게 전달하며 영향력을 끼치는 인플루언서이다.
우리는 공감과 감수성을 자극할 정도로 표현된 그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면서 그 멋에 취한다. 단순히 노래가 좋고 얼굴이 잘생기고 예뻐서 좋다고 뭉뚱그려하는 대답의 기저에 그 본능이 깔려 있고, 우리는 그것에 끌린다.
나를 표현하는 방법은 정말 다양하다. 발표 역시 극적으로 나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선택하고, 내용의 당위성을 위해 근거를 찾고, 비유와 인용 어구를 접착제로 삼아 내용과 근거를 연결한 글감 덩어리들을 가지고 어떤 인과관계로 엮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 자체가 나만의 개성이다. 그 고민의 흔적이 스토리로 승화되어 나만의 콘텐츠가 완성된다.
나와 청중 사이를 채우는 적막한 공기.
공기를 울리는 목소리가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건 무대 위 가수만의 몫이 아니다.
발표로도 청중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 따라서 나를 표현하기 위해 서 있는 모든 장소가 무대이다.
내 발표로 청중의 시야를 트이게 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선사한다는 건, 세상의 발전에 기여하는 작으면서도 숭고한 일이다.
"편안함이 끝나고 궁핍이 시작될 때 인생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 헤르만 헤세"
체험적 지혜는 지식의 축적으로 생기지 않는다. 백날 좋은 말만 듣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좋은 말은 무용지물이다. 위험한 도전을 감행하고 그 시행착오 끝에 몸으로 혜안을 얻을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된다. 곤란한 삶을 타개할 수 있는 묘안은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각성과 현재의 지식으로는 곤란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어제와 다른 출발을 북돋운다.
발표는 콘텐츠를 구성하는 과정부터 청중 앞에서 발표하기까지 쉬운 게 하나도 없다. 그중 으뜸은 많은 사람들 앞에 나와서 말을 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랴, 발표할 내용을 까먹지 않을까 노심초사 내 발표를 청중이 잘 들을지 등등 두려움이 머리를 지배한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에 직접 부딪쳐봐야 혜안을 얻을 수 있다. 떨리는 목소리를 줄이기 위해 호흡을 어떻게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말하기 속도를 어떨 때 빠르게 하고 느리게 할지, 발표할 내용을 까먹지 않기 위해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자그마한 신호들을 어디에 배치할지, 전달력 있는 어조와 강약 그리고 목소리의 크기 및 제스처 등등 이런 체험적 지혜는 오로지 실전을 통한 수많은 연습에서 얻을 수 있다.
"발표는 나의 데뷔 무대"
발표하는 5~10분의 시간만큼은 친구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인플루언서로써, 교단 앞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책임감과 청중을 씹어 먹겠다는 각오를 안고 여러분의 이야기를 스스로의 목소리로 전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가지자.
처음이 주는 설렘은 가슴을 떨리게 하고 두려움은 몸을 떨리게 한다. 두려움은 수많은 리허설로 극복해야 한다. 부디 몸을 떨리게 하는 두려움이 뿌듯함과 보람으로 바뀔 설렘으로 가득한 여러분만의 데뷔 무대를 한 번은 꼭 갖길 바란다.
「참고자료 및 문헌」
각종 이미지 출처 - 구글
꿈꾸는 사과 - 모지현
디즈니 철학 수업 - 메건 로이드
책쓰기는 애쓰기다 - 유영만